소년은 얼어붙은 흙을 뚫고 나온 노란색 도미스 뿌리를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삭막한 풍경 속에서 생기 넘치는 색채를 뽐내며 자라난 수백 송이 중 하나였다. 소년은 꽃 옆에 웅크리고 앉아 숨을 들이켰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소년이 야생화를 꺾으려 손을 뻗었다.
"그대로 둬라." 바니스가 말했다.
덩치가 큰 중년의 남자가 소년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의 푸른 망토가 가벼운 산들바람에 휘날렸다. 마르시노는 불이 붙지 않은 횃불을 들고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시노가 소년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꽃을 꺾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니스가 고개를 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이와 너무 오래 어울리더니 버릇이 나빠졌군."
그 말에 마르시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미소는 사라졌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뭐 보이는 거 있나?"
소년은 일어서서 서리로 덮인 들판 건너편의 집들을 관찰했다. 비바람에 낡아 해진 판잣집들이 언덕 비탈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주조 유리창 너머로 형체와 그림자가 움직였다.
"안에 사람들이 있어요." 소년이 말했다.
"그거야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다." 바니스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우리가 찾는 게 보이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아주 작은 단서나 흔적이라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비바람에 낡은 널판지와 거친 돌의 무채색뿐이었다.
"아니요, 대장님."
바니스가 툴툴거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게 어떨까요?" 마르시노가 제안했다.
바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산골 사람들이다. 문 앞 20보 이내로 접근하기도 전에 창을 들이밀 놈들이야."
소년은 그 말에 몸을 떨었다. 남부 산골 사람들의 흉흉한 명성은 대도시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왕국의 길들여지지 않은 변방, 분쟁 지역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소년은 어깨너머를 힐끗 보며 마르시노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횃불에 불을 붙여라." 바니스가 명령했다.
마르시노가 부싯돌을 치자 기름을 머금은 줄에 불꽃이 튀었다. 역청이 타오르며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몰아냈다.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오두막 문이 잇따라 열리더니, 열두 명 정도의 남녀가 무리 지어 나왔다. 그들은 창과 도끼를 들고 있었다.
소년의 손이 허리춤의 단검으로 향했다. 마르시노를 돌아보았지만, 마르시노의 시선은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정해라, 꼬마야." 바니스가 말했다.
군중은 들판 끝에 멈춰 섰다. 그들의 남루한 옷차림은 바니스와 마르시노가 입은 왕실의 청백색 예복과 확연히 대비되었다. 소년의 옷조차 그들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소년이 마르시노의 팔을 툭 치며 신호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르시노는 신호를 알아듣고 물러서라는 몸짓을 했다. 따라야 할 절차가 있었다.
군중 뒤에서 한 노파가 걸어 나왔다. "마력추적자들이 이제는 마을을 불태우러 다니는 건가?"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 당장 꺼져!" 노파 옆에 서 있던 덥수룩한 머리의 청년이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도 거들며 야유와 고함을 내뱉었다.
"조용히 해!" 노파가 청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꾸짖었다.
청년은 신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군중은 곧 침묵에 빠졌다.
산골 사람들은 소년이 대도시에서 보아온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전통적인 푸른 망토를 입고 망치로 두드려 만든 청동 반가면을 쓴 마력추적자를 보고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다. 몇몇은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소년을 노려보았고, 소년은 시선을 피했다.
마르시노가 앞으로 나섰다. "6일 전, 렌월에 도미스 뿌리 한 묶음이 들어왔더군." 그가 횃불로 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게 도시에선 죄라도 되나?" 노파가 물었다.
산골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도 긴장한 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마르시노마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바니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을 준 채 무리를 응시했다.
"물론 아니죠." 마르시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 꽃은 이맘때면 아주 희귀하니까요."
"우린 농사도 잘 짓고, 사냥도 잘해." 노파가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바니스가 노파를 쏘아보았다. "그렇군. 하지만 땅은 얼어붙어 있고, 너희 중에 쟁기질을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노파가 어깨를 으쓱했다. "식물은 자기가 자라고 싶은 곳에서 자라는 법이지. 우리가 뭐라고 하겠나."
바니스가 비웃었다. "그래, 식물은 자라지." 그가 망토에서 그레이마크(LEAGUEOFLEGENDS)를 떼어냈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조각된 돌 원반을 도미스 뿌리 위에 가져다 댔다.
꽃잎이 시들고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페트리사이트(LEAGUEOFLEGENDS)를 보면 식물이 죽지는 않지." 바니스가 일어서며 말했다. "마법으로 키운 게 아니라면 말이야."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마법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마르시노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데마시아인이다. 법을 지키고 맹세해야 할 의무가 있지."
"여기선 명예를 먹고 살 순 없어." 노파가 쏘아붙였다.
"먹을 수 있다 해도 배는 채울 수 없겠지." 바니스가 비웃었다.
모욕적인 말에 군중이 술렁이며 마력추적자들에게 몇 보 앞까지 다가왔다.
마르시노가 헛기침을 하며 손을 들었다. "산골 사람들은 항상 데마시아의 법도와 전통을 존중해 왔소. 오늘 다시 한번 그렇게 해주길 바랄 뿐이오. 마법에 오염된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시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었다.
잠시 후, 마르시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명예가 당신들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죄인을 찾아낼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아두시오."
군중의 시선이 소년에게 쏠렸다. 비난이 담긴 눈빛과 거친 속삭임이 무리 사이로 흘렀다.
"저 꼬맹이는 마법을 써도 벌을 안 받는데, 우리는 왜 안 된다는 거지?" 아까 소리쳤던 남자가 물었다.
소년은 비난에 몸을 움츠렸다.
"이 아이는 데마시아를 위해 일하는 거다." 마르시노가 말하고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괜찮다, 시작해라."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지 위로 땀 젖은 손바닥을 문지른 뒤 산골 사람들을 향해 섰다. 흙먼지 묻은 얼굴들 사이로, 유독 빛을 발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마법사 주위로 빛의 관이 맥동하며 일렁이고 있었다.
이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년뿐이었고, 평생 그래왔다. 이것은 소년의 재능이자, 저주였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경멸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똑같았다. 이 사람들은 소년의 재능을 혐오했다. 노파를 제외한 모두가 그랬다. 노파의 부드러운 눈빛은 그저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떨구고 땅을 보았다.
정적이 길어지자 모두가 기다렸다. 소년은 바니스가 자신을 평가하고 있으며, 혹독하게 판단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마르시노가 격려의 손을 소년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우리는 질서를 지키고, 법을 수호하는 거다."
소년이 고개를 들고 마법사를 지목하려 했다.
"말하지 마라, 얘야." 노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받아들이마. 내 말 들리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바니스가 그레이마크를 든 채 소년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군중이 다가오자 마법사 주위의 찬란한 빛이 잠시 흐려졌다.
"잠깐만요!"
"조용히 해라, 소년. 기회는 줬다."
하지만 오염된 것은 노파가 아니었다.
소년이 마르시노를 돌아보았다. "저 여자가 아니에요! 저쪽이에요!" 소년이 노파 옆에 서 있던 덥수류한 머리의 남자를 가리켰다.
마르시노가 시선을 돌려 소년의 손짓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위협을 감지하기도 전에, 남자가 마력추적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엄마!" 남자가 바니스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그의 손끝에서 에메랄드빛 광채가 돌더니 가시 돋친 덩굴이 피어올랐다.
바니스가 몸을 돌려 피하며 육중한 나무 지팡이를 크게 휘둘러 마법사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마법사는 비틀거리며 마르시노에게 부딪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날카로운 가시가 마르시노의 소매를 뚫고 박혔다. 마르시노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남자를 바닥으로 밀쳐냈고, 그 와중에 횃불을 떨어뜨렸다.
불꽃이 남자의 튜닉을 핥으며 순식간에 불길이 번졌다.
노파가 비명을 지르며 아들에게 달려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붙잡아 말렸지만, 그녀는 거칠게 저항했다. 나머지 산골 사람들이 밀려들었지만, 바니스가 지팡이를 든 채 굳건히 버텼다.
"닿았느냐?!"
마르시노가 무기를 더듬거렸다. 정신이 혼미한 채 홀린 듯이 홀(Scepter)을 꺼내려 했다.
"마르시노!"
"난 괜찮아!"
"더 없나?" 바니스가 소리쳤다.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마법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목구멍으로 쓴물이 올라왔지만, 구역질을 참으며 억눌렀다.
"소년!"
소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불길이 들판으로 퍼져 나가며 그들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었다. 불꽃 뒤에서 살의를 품은 얼굴들을 살폈고, 뜨거운 열기가 소년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없어요."
"그럼 말에 타!"
소년은 조랑말에 올라탔다. 마르시노와 바니스도 급히 말에 올라타 마을에서 멀어졌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화염이 거세게 타올랐고, 꽃밭은 이미 시들어 가고 있었다.
바니스는 밤이 깊을 때까지 말을 몰아 산골 사람들과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렌월 성까지는 3일이 걸릴 예정이었다. 바니스는 마력추적자 병력을 소집해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는 법은 반드시 수호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바위가 많은 지형이라 이동이 위험했기에, 그들은 어둠이 내린 후 곧장 야영했다. 소년은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어 안도했다. 드레그본(LEAGUEOFLEGENDS) 출신 소년들은 마구간에서 훔치지 않는 이상 말을 탈 일이 거의 없었고, 소년은 도둑질에 소질이 없었다.
소년은 거대한 오크 나무 아래 앉아 첫 번째 경계를 섰다. 오랜 시간 말을 타느라 엉덩이와 등이 쑤시고 뻣뻣했다. 소년은 자세를 바꾸며 편한 위치를 찾았다. 잠시 후, 일어나 거대한 나무에 몸을 기댔다. 어딘가 언덕 위에서 늑대 한 마리가 울부짖자 다른 무리들이 합창하듯 응수했다. 아니면 브라겟 하운드였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아직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멀리 밤하늘에서 천둥이 번뜩였지만, 귀에는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이었다. 머리 위로는 회색 구름 사이로 별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지대에는 짙은 안개가 깔렸다.
소년은 모닥불에 나무 한 묶음을 더 던져 넣었다. 불똥이 튀었으나 이내 사그라들었다.
고요함 속에서 죽은 마법사에 대한 환영과 기억이 맴돌았다. 소년은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잔혹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소년은 바니스와 마르시노와 함께하며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들을 떠올리며 생각을 떨쳐냈다.
수개월 동안 마력추적자들과 여행하며 드레그본의 좁은 골목 밖 세상을 처음 보았다. 빈민가 지붕 위에서 바라보던 먼 언덕과 산들을 직접 탐험했다. 이제는 새로운 산들이 눈앞에 있었고,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다.
마법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한때 발각될까 두려웠던 저주가 이제는 재능이 되었다. 덕분에 진정한 데마시아인처럼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심지어 푸른 옷도 입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반가면과 그레이마크를 갖게 될지도 몰랐다.
희미한 부스럭거림에 생각이 깨졌다.
소년이 돌아보니 마르시노가 잠결에 웅얼거리고 있었다. 옆에는 빈 담요만이 굴러다녔다. 소년의 심장이 철렁했다. 숲을 살피자 바니스가 근처 나무 아래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주저했더구나." 바니스가 그림자 속에서 나오며 말했다.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나,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소년은 시선을 피한 채 묵묵부답으로 마력추적자를 만족시킬 답변을 찾았다.
바니스가 조급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말해봐라."
"이해할 수 없어서요… 도미스 뿌리를 키우는 게 무슨 해가 된다고…"
바니스가 툴툴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얻은 만큼 잃는 법이다." 그가 말했다. "전쟁터에서도 그렇고 마법사에게도 마찬가지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니스가 잠시 소년을 응시했다.
"네 심장은 어디에 있느냐, 소년?"
"데마시아를 향해 있습니다, 대장님."
마르시노가 다시 몸을 뒤척였다. 웅얼거림은 어느새 신음으로 변했고, 그는 담요 속에서 몸부림쳤다.
소년이 다가가 마르시노의 어깨를 흔들었다. "마르시노, 일어나세요." 소년이 속삭였다.
젊은 마력추적자가 소년의 손길에 비틀거렸다. 신음소리가 커지더니 이내 비명이 되었다. 소년이 더 세게 흔들었다.
"무슨 일이지?" 바니스가 다가오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깨어나질 않아요."
바니스가 소년을 옆으로 밀치고 마르시노를 뒤집었다. 땀이 이마와 관자놀이를 적시고 검은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마르시노의 눈은 뜨여 있었으나 초점이 없었고, 뿌연 흰자위가 번뜩였다.
바니스가 두꺼운 담요를 걷어내고 마르시노의 망토를 열었다. 팔에 검은 곰팡이 같은 흔적이 퍼져 있었다. 소년의 눈에는 오염된 피부 아래로 찬란한 꽃이 맥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동이 트기 전부터 말을 달렸다.
바니스와 소년은 마르시노를 말에 태우고 안장에 고정했다. 마르시노는 열병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내뱉었고, 바니스는 그의 말을 자신의 말에 묶은 채 서둘러 이동했다.
소년의 조랑말은 바니스가 정한 속도를 따라가느라 헐떡였다. 렌월 성까지는 아직 하루 넘게 걸렸다.
소년은 마르시노가 발걸음마다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상자가 떨어질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바니스는 그때마다 속도를 늦추고 다시 고정했다. 그럴 때마다 바니스는 소년을 쏘아보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오전 중반에 코르보 고개에 도착했다. 산비탈에 깎아지른 듯한 좁은 비탈길을 따라 말이 올라갔다. 이동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주겠지만, 관리가 되지 않은 험로라 수풀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소년은 다리에 힘을 주고 고삐를 움켜쥐며 아래의 깊은 골짜기를 불안하게 내려다보았다. 조랑말은 그저 묵묵히 걸으며 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했다.
수풀을 헤치고 평평한 공터로 나오자, 바니스가 등자를 밟고 말을 몰아 속도를 올렸다. 마르시노가 평소보다 훨씬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바니스!"
마력추적자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마르시노가 말에서 떨어져 땅에 처박혔다.
소년은 말을 멈추고 뛰어내려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갔다. 바니스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시노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지혈해야 한다." 바니스가 말했다.
그는 단검을 꺼내 소년의 망토 끝을 길게 찢었다.
"물."
소년이 물통을 가져와 깊은 상처에 물을 부었고, 바니스가 상처를 닦아냈다.
마르시노가 열병에 시달리며 횡설수설했다. 소년은 그의 말을 알아들으려 애썼지만 몇 마디만 들릴 뿐이었다.
"마셔요." 소년이 말의 마른 입술에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젊은 마력추적자가 혀를 날름거리며 물기를 들이켰다. 그가 눈을 떴다. 뿌연 흰자위에 붉은 반점이 번져 있었다.
"우리… 도착했나?" 마르시노가 말마다 가슴을 쌕쌕거렸다.
바니스가 소년을 힐끗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도움을 받기엔 아직 멀었다.
"거의 다 왔다, 형제여." 바니스가 말했다.
"왜… 렌월을… 저런 산꼭대기에 지었을까?"
"접근하기 힘들어야 하니까." 바니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르시노가 눈을 감고 희미하게 웃었다. 곧 기침으로 변했다.
"진정해라." 바니스가 한참을 지켜보다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미스 뿌리, 아직 가지고 있나?"
"네."
소년은 주머니를 뒤져 짚으로 만든 말과 강돌, 노란 꽃을 꺼냈다. 이 꽃이 마르시노를 도와줄 거란 생각에 소년은 미소 지었다.
바니스가 소년의 손에서 꽃을 낚아챘다. "적어도 하나는 제대로 했구나, 소년."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니스가 맞았다. 소년은 주저했고, 그 대가를 친구가 치렀다.
마르시노가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 잘못이… 아니야…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어."
늙은 마력추적자는 묵묵히 도미스 뿌리에서 꽃잎 몇 장을 떼어냈다.
"이걸 씹어라. 가공하진 않았지만 통증을 덜어줄 거다."
"마법은… 어떻게 하고요?" 마르시노가 물었다.
"성장을 촉진하고 강하게 만들었지만, 식물 자체는 오염되지 않았다." 바니스가 꽃잎을 마르시노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그는 마르시노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르시노가 어떤 기억에 잠긴 듯 미소 지었다.
소년은 물통을 들이켰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팔의 솜털이 쭈뼛 섰다.
소년은 공터 끝으로 걸어갔다. 아래 저지대는 푸른 소나무 숲으로 덮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바니스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소년은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었고, 감각마저 사라졌다.
"착각이었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먼 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목초지에 널브러진 불타버린 시체들을 응시했다. 타버린 짐승의 살냄새가 공기를 채웠다. 소년의 배가 꼬르륵거렸다.
"뭐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소년이 마르시노를 돌보며 물었다. 젊은 마력추적자는 담요와 밧줄로 만든 즉석 들것에 누워 있었다.
"모르겠다. 여기서 경계를 서라."
늙은 마력추적자는 죽은 소들을 조사했다. 모두 두꺼운 가죽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니스가 지팡이 끝으로 그을린 구멍을 찔러 깊이를 가늠했다. 지팡이의 3분의 1이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떠나는 게 좋겠어요." 소년이 말했다.
바니스가 소년을 돌아보았다. "느껴지는 게 있느냐?"
소년은 죽은 소들을 살펴보았다. 그을린 살 아래로 마법의 흔적이 방사되고 있었다. 무엇이든 이 거대한 짐승을 죽인 것은 강력했다. 인간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지팡이를 든 마력추적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농가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 통나무집과 낡은 헛간, 구석에 화장실이 있었다. 농장은 언덕에 기대어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연기가 아니었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곳이었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니스가 몸을 돌려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한 노인이 헛간 모퉁이를 돌다 멈춰 섰다. 그는 체격에 맞지 않는 헐렁한 바지와 튜닉을 입고, 날이 시퍼렇게 빛나는 오래된 미늘창을 들고 있었다.
"내 농장에서 뭐 하는 짓인가?" 노인이 물으며 무기를 고쳐 쥐고는 바니스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했다.
"제 친구가 다쳤어요." 소년이 대답했다. "제발요, 도움이 필요해요."
바니스가 소년을 곁눈질했지만 말은 없었다.
농부는 들것에 누워 헛소리를 하는 마르시노를 내려다보았다.
"렌월에 치유사가 있다." 농부가 말했다.
"말을 타고 하루 넘게 가야 해. 그전에 숨이 끊어질 거다." 바니스가 말했다.
"이 숲엔 짐승이 산다. 당장 떠나는 게 좋을 거다." 농부가 죽은 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년은 울창한 숲을 보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까 느꼈던 전율이 떠올랐다. 그 거리라면 거대한 괴물임이 틀림없었다.
"어떤 짐승이죠? 드래곤인가요?"
"진정해라, 꼬마야." 바니스가 농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데마시아 군인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을 텐데."
농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은 파란 옷을 입었지만… 마력추적자는 군인이 아니지."
"그래, 하지만 한때는 그랬지. 당신처럼."
농부의 눈이 가늘어졌고, 미늘창의 창끝이 바니스를 향했다.
"그 폴 클리버(Pole cleaver)군." 바니스가 말했다. "기억이 맞다면 고(古) 쏜월 미늘창병들이 쓰던 창이지. 내가 보기엔 그 창도, 이 노병도 예리함은 잃지 않은 것 같군."
농부가 무기를 힐끗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래전 일이지."
"형제는 평생가는 법이다." 바니스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주시오. 우리 친구를 살려낸 뒤 저 괴물을 사냥해 주겠소."
소년은 마르시노를 내려다보았다. 마르시노는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농부는 제안을 고민하며 바니스를 쳐다보았다. "그럴 필요는 없네." 그가 결국 말했다. "이 사람을 안으로 들이세."
바니스와 농부는 마르시노를 오두막으로 옮겼다. 화덕에는 작은 불꽃이 타고 있었고 방 안은 삼나무와 흙 냄새가 났다. 소년은 중앙의 식탁을 치우며 나무 그릇과 딱딱한 비스킷을 근처 잠자리에 던져 놓았다. 남자들은 마르시노를 식탁 위에 눕혔다.
"누구 또 없나?" 바니스가 단검으로 마르시노의 튜닉을 자르며 물었다.
"혼자 산다네." 노인이 상처를 확인하며 말했다. 소년의 눈에는 곰팡이가 퍼져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촉수들이 마르시노의 목과 심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도려내야 해." 바니스가 말했다.
마르시노가 경련을 일으키며 식탁에서 떨어질 듯 요동쳤다.
"붙잡아라." 바니스가 명령했다. 소년이 마르시노의 다리를 눌러 고정했다. 마르시노가 저항하며 발길질을 했고, 바닥에 있던 두꺼운 부츠가 소년의 입을 가격했다. 소년은 턱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
"붙잡으라고 했다!" 바니스가 단검을 닦으며 소리쳤다.
소년이 다시 마르시노의 다리를 잡으려 하자 농부가 대신 나섰다.
"괜찮다, 얘야." 농부가 말했다. "말을 걸어보렴."
농부가 식탁 옆으로 다가왔다. 마르시노의 경련은 잦아들었지만, 가슴은 여전히 거칠게 들썩였다.
"마르시노?"
"손을 잡아주렴. 여기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 농부가 말했다. "다친 동물들에게도 효과가 있지.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단다."
소년이 마르시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땀에 젖어 미끈거렸다. "괜찮을 거예요. 우릴 도와줄 분이 계세요."
마르시노는 소년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듯했고, 뿌옇던 눈동자가 진한 붉은색으로 변해 소년을 향했다.
"우리… 도착했나?"
소년이 바니스를 보았고, 마력추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치유사가 치료 중이에요." 소년이 말했다.
"도미스 뿌리가… 시간을 좀… 벌어줬군." 마르시노가 소년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소년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놓치고 싶지 않아 마르시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미안해요, 마르시노. 제가 조금만 더…"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마르시노가 고통스럽게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눈으로 방 안을 훑으며 고개를 들려 애썼다.
"바니스?"
"여기 있다, 형제여."
"저 애에게… 전해줘… 저 아이 잘못이 아니라고."
바니스가 소년을 쏘아보았다. "그래,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봐…" 마르시노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는… 짊어질 필요… 없어."
바니스가 마르시노의 어깨를 꽉 쥐고 귀에 대고 속삭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르시노는 어떤 추억에 잠긴 듯 웃었다.
소년은 물통을 들이켰다. 등줄기에 또다시 전율이 일었다. 팔의 솜털이 쭈뼛 섰다.
소년은 방 끝으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소나무 숲이 내려다보였다.
"무슨 일이지?" 바니스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소년은 골짜기를 응시했다. 이상한 것은 없었고, 감각마저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년은 말을 멈췄다. 저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산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소년은 헛간으로 달려갔다. 곰팡이를 처리할 재료가 그곳에 있었다. 헛간 문이 20보 앞에 있었을 때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소년은 멈춰 섰다.
주변 숲은 어둡고 조용했다. 소년은 짙은 수풀 속에서 마법의 기운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목초지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등 뒤로 감각이 번져나갔다. 무언가 근처에 있었다.
바니스에게 경고해야 했지만, 소리를 지를 순 없었다.
돌아가야 할까?
오두막 안에서 또 한 번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르시노를 위해 용기를 내야 했다.
소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헛간으로 뛰어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빗장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등줄기에 강한 자극이 솟았다.
소년은 뒤로 자빠지며 농기구 랙에 부딪혔다. 삽과 곡괭이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괴물은 헛간 안에 있었다.
소년은 단검을 찾았지만 없었다. 마르시노에게 주었던 것이다. 마구간 한곳에서 은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빛이 강해지더니 한 형체가 마구간 모퉁이를 돌며 나타났다. 소년은 그토록 눈부신 빛을 본 적이 없었다. 공기가 색깔별로 일렁였다.
형체가 다가왔다.
머릿속에서 수천 마리의 벌떼가 윙윙거리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소년은 뒤로 기어가며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이 빛과 색채 속에 사라졌다.
형체가 광채를 뚫고 나오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조각난 단어들이 합쳐졌다.
"아빠?"
그 한마디에 세상이 제자리를 찾았다.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겁에 질린 채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녀의 주위에서 빛의 고리가 다시 밝게 타올랐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찬란함에 손을 뻗고 싶어졌다.
"누… 누구세요?" 소녀가 물었다.
"난… 사일러스야." 소년이 손을 내밀며 일어섰다. "너를 해치지 않을게… 네가 먼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소녀는 손을 꽉 쥐고 가슴에 댔다. "전 누구도 해치지 않아요…" 소녀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말했다. "일부러는요."
소년은 목초지의 죽은 소들을 떠올렸다. 그 생각을 밀어내고 금발의 아이에게 집중했다. 자기 집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작고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믿어." 소년이 말했다. "항상… 쉽지는 않지."
소녀 주위의 빛이 흐려지자 소년을 끌어당기던 힘도 약해졌다.
소녀가 소년을 쳐다보았다. "아빠 못 봤나요?"
"안에 계셔. 내 친구를 돕고 계시지."
소녀가 조심스럽게 소년의 손을 잡으려 했다.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
소년이 손을 뺐다. "안에 들어가면 안 돼."
"아빠한테 무슨 일 있나요?"
"아니. 마력추적자를 돕고 계셔."
소녀가 마력추적자라는 단어에 몸을 떨었고, 헛간 안이 다시 밝아졌다. 소녀도 위험을 이해하고 있었다.
"당신은 마력추적자인가요?"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이 소년의 마음 깊은 곳을 후벼 팠다.
"아니." 소년이 대답했다. "난 너랑 같은 부류야."
소녀가 미소 지었다. 마력추적자의 칭찬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진심 어린 따스함이었다.
오두막에서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아빠?"
"내 친구야. 난 돌아가야 해." 소년이 말했다. "우리가 떠날 때까지 숨어 있을 수 있겠니? 할 수 있겠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소년이 말했다. "루나 코스틱(Lunar caustic, 질산은) 어디 있는지 아니?"
소녀가 좁은 선반 위에 있는 점토 항아리를 가리켰다.
소년은 항아리를 낚아채 헛간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두막에서 다시 한번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소년은 속도를 높여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찾았어요!" 소년이 항아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방 안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바니스는 마르시노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농부만이 문을 돌아보았다.
노인의 눈에는 두려움과 원망이 서려 있었다. 소년이 마법을 숨기려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눈빛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미늘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선은 소년과 여전히 미동도 않는 바니스 사이를 오갔다.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농부가 잠시 멈추더니 헛간 쪽을 보고는 다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농부에게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농부는 잠시 소년을 응시하더니 무기를 벽에 기대어 놓았다.
바니스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왜 이렇게 늦었지?" 마력추적자가 물었다.
"아이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 친구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바니스가 시신에서 물러나 잠자리에 앉았다.
"이 녀석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다." 바니스가 쏘아붙였다. "알고 있나? 이놈도 저들과 같은 부류야. 정상인 척하고 있지."
"당신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농부가 말했다. "그 사람의 마지막 뜻을 존중하시오."
바니스가 마르시노의 시신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방바닥에 흩어진 수십 개의 조각 도구들과 나무 인형들을 응시했다.
"너무 감상적인 젊은 바보였지." 바니스가 마침내 말했다. 그 뒤로 바니스는 침묵에 잠겼다.
농부와 소년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불편한 침묵을 지켰다.
"그럼 저랑 괴물을 사냥하러 가시겠습니까?" 바니스가 농부에게 물었다.
"필요 없네." 농부가 말했다. "당신 친구나 돌보게. 마차가 있으니 가져가도록."
"여기에 당신만 홀로 두는 건 도리가 아니지." 바니스가 말했다. "형제를 버리는 꼴이 되잖소."
마력추적자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어 소년은 불안함을 느꼈다. 슬픔은 다시 의심으로 변했다. 슬퍼하던 스승은 다시 취조관이 되었다.
"난 괜찮네." 농부가 말했다. "파란 옷을 입던 시절부터 혼자였으니까."
"물론이겠지." 바니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력추적자는 침대에서 뛰어올라 농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단검 끝이 농부의 목 바로 앞에 닿아 있었다.
"어디 있지?"
"뭐가?" 농부가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그 괴물 말이다."
"숲… 숲속에 있어."
"밤마다 오두막에서 잠을 자나?"
"뭐라고?"
"저 해먹(hammock) 말이다." 바니스가 그물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캠페인을 오래 다니다 보면 그게 제일 친한 친구가 되지."
바니스가 단검을 농부의 살에 더 깊이 밀착시켰다. "그런데 왜 굳이 침대를 따로 두지?"
"그건… 딸애가 쓰던 거라네." 농부가 소년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지난 겨울에 죽었지."
소년은 잠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 체격에 맞춘 것이었다.
하지만 침대뿐만이 아니었다. 나무 그릇과 숟가락, 다 큰 어른이 쓰기엔 너무 작은 연습용 검도 있었다. 소년이 거짓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무덤을 가보지." 바니스가 말했다.
"그럴 수 없네." 농부가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괴물이 데려갔거든."
"당신의 가축들을 데려간 것처럼?" 바니스가 비웃었다. "내기하지. 잘 찾아보면 농장 어디엔가 숨어 있을 거야."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소년이 말했다. "가요."
"저 탁자 위에 뭐가 보이지, 소년?"
소년은 마르시노의 시신을 응시했다. 피 묻은 눈은 뜬 채 죽어 있었다. 곰팡이 촉수가 목을 조이고 얼굴까지 뒤덮고 있었다.
"뭐가 보이냐고!"
"마르시노… 마르시노예요." 소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력추적자다, 소년. 내 동료지." 바니스가 말했다. 분노와 고통이 말끝마다 묻어났다. "네게 그는 뭐지?"
마르시노는 마력추적자들 중 유일하게 소년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이다. 그는 저주에도 불구하고 소년을 진정한 데마시아인으로 받아주었다.
"내 친구였어요."
"그래… 그리고 그는 마법사에게 죽었지." 바니스가 말했다. "이 남자는 우리에게 마법사를 숨기고 있어. 아주 위험한 놈을."
소년은 어린 소녀가 뿜어내던 강렬한 빛과 불타버린 가축들을 기억했다.
"어떻게 할까?" 바니스가 물었다.
소년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질서를 지키고, 법을 수호해야죠."
바니스는 소년과 농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은 목초지에 서서 헛간과 화장실을 감시했다. 바니스가 지팡이로 농부의 옆구리를 찔렀다.
"딸을 불러내라."
농부가 고통에 몸을 움츠렸다. "없다니까요. 떠나버렸어요."
"두고 보면 알겠지."
노인이 소년을 보며 말없이 애원했다.
"헛간을 조사할게요." 소년이 말했다.
"아니. 스스로 나오게 해야지." 바니스가 지팡이 끝으로 농부의 머리를 때려 바닥에 쓰러뜨렸다.
"나와라! 아비가 여기 있다!"
대답이 없었다.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다 농부가 신음했다.
소년이 돌아보니 농부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관자놀이를 감싸 쥐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와 손을 적셨다. 바니스가 다시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다." 바니스가 분노와 슬픔에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다시 한번 팔과 목의 솜털이 쭈뼛 섰다.
헛간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래, 나와라." 바니스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문턱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당황한 눈빛이 피 흘리는 아빠에게 고정되었다.
"아빠…"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괜찮다." 농부가 말을 더듬었다. "아빠는 그냥… 이분들과 얘기하는 중이란다."
모두가 소녀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직 소년만이 볼 수 있는 진실을 남자들은 알지 못했다.
소녀는 정오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안의 힘이 맥동하며 색깔을 바꾸었다. 빛 자체를 굴절시키는 찬란한 광채였다. 소녀는 살아있는 무지개였다.
이것이 소년의 저주이자, 재능이었다.
소년만이 마법의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본질을 볼 수 있었다. 이 겁에 질린 아이 속에도, 데마시아의 모든 마법사 속에도, 어쩌면 전 세계 모든 존재 속에 마법은 살아있었다. 어떻게 그것을 배신할 수 있을까? 소년은 이미 볼 것을 다 보았다.
"이 아이는… 보통이에요."
"확실하나? 다시 똑바로 봐!"
소년은 마력추적자를 돌아보았다. 데마시아에게 바니스는 마법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숭고한 보루였지만, 소년에게 그는 전통에 매몰된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틀리셨어요. 이제 가요."
바니스가 잠시 소년을 응시하며 기만적인 구석이 있는지 살폈다. 마력추적자가 고개를 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 아이가 심사를 통과하는지 지켜보겠다." 그가 망토에서 그레이마크를 꺼내며 말했다.
페트리사이트 문양을 본 농부의 눈이 커졌다.
"도망쳐, 얘야! 어서!" 농부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바니스에게 달려들었다.
바니스가 빠르게 움직여 지팡이로 농부의 복부를 찔렀다. 농부가 고통에 비틀거렸고, 바니스가 달려들어 농부의 머리를 지팡이로 내리쳤다. 농부의 머리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양손에서 번개가 타올랐다. 이제는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바니스가 그레이마크를 내밀어 번개를 가두고 마법을 억제하려 했다. 하지만 페트리사이트는 소녀의 힘에 압도되어 순식간에 검게 변하고 갈라졌다. 바니스가 망가진 원반을 떨어뜨리고 돌아서서 나무 지팡이를 아이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안 돼!"
소년이 소녀에게 달려들어 지팡이와 빛의 물결 사이에 몸을 던졌다. 팔에 털이 타들어 가고 작은 마법사와 닿은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번개 줄기가 소년의 손을 뚫고 지나갔고, 타오르는 전류가 육신을 관통하며 온몸을 비틀었다. 심장이 옥죄어지고 폐 속의 공기가 모두 빠져나갔다. 숨을 들이켜려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의 마법이 들이닥치자 시야가 흐려지고 색채가 사라졌다. 바니스는 지팡이를 휘두른 채 고대의 조각상처럼 멈춰 섰다. 소녀 또한 굳어 있었고, 소녀의 눈물은 무미건조한 결정체처럼 변해갔다. 찬란한 빛은 희미해져 갔다…
그때 폐에 공기가 다시 차올랐다.
심장이 다시 뛰며 온몸에 마비될 듯한 평온함을 퍼뜨렸다. 몸 안의 불꽃은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소년을 태우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게 흐르며 소년의 생각에 따라 모양이 바뀌었다. 그러다 갑자기 번쩍이며 뜨겁게 타오르더니 더 이상 몸속에 가둘 수 없게 되었다.
소년의 손에서 빛이 폭발했고, 세상이 사라졌다.
사일러스가 눈을 떴다. 그을린 땅 위에 세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한 명은 부러진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다른 두 명은 서로 가까이 쓰러져 팔을 뻗은 채 영원히 떨어져 있었다. 실패를 확인한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후회가 마음을 짓눌렀다. 소년은 등을 대고 누워 몸을 떨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무수한 별이 펼쳐져 있었다. 별들이 어둠을 가로질러 검은 나무 숲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밤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할 때쯤 소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소년은 시체들로부터 멀어졌다. 잠시 멈춰 섰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 없었다. 그 모습은 평생 뇌리에 남을 테니까. 소년은 생각을 떨쳐내고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산맥을 응시했다.
렌월이나 다른 마력추적자 거점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어떤 변명으로도 그들의 처벌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소년을 찾아낼 것이고, 심판대에 세우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법은 수호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소년은 그들의 방식을 알고 있었고, 데마시아는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