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의 심판 - 1회 신 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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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챔피언 : 신 짜오
  • 날짜 : CLE 20년 7월 13일


관찰

대전당 안으로 들어서는 신 짜오의 절제된 존재감이 주위를 꽉 채우는 것만 같다. 반들반들 광이 나는 데마시아 갑옷만큼이나 익숙한 단호하고도 엄격한 표정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다. 한눈에도 신 짜오임을 알아볼 수 있는 높이 틀어 묶은 머리칼이 등 뒤로 나부끼며, 불빛이 깜박일 때마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반짝인다. 한 손에는 칼날이 달린 커다란 공성용 망치를 마치 창처럼 들고 있다. 들고 있기 버거운 척하고는 있지만, 눈썰미는 있어도 판단력은 별로 날카롭지 않은 이들을 속이기 위한 술책일 뿐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회고의 방 문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서도, 써밋의 조각상 어깨의 징 박힌 견장 장식부터 뱀처럼 구불구불 타고 내려온 북쪽 벽면의 균열까지 대전당의 구석구석을 이미 완벽히 파악해 뒀다. 신 짜오는 허리까지 진흙탕 속에 빠져 있대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을 걸음걸이로 곧장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잠시 멈춰 문 위에 새겨진 글귀를 살펴본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손만 갖다 댔을 뿐인데 거대한 대리석 문이 스르르 열린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문 틈으로 쏟아져 나와 신 짜오의 발치를 물들인다. 속박 당한 어둠의 정수로부터 흘러나온 이 어두컴컴한 물질이 빛을 빨아들여, 입구의 가장자리에 일종의 반전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이한 현상도 아랑곳없이 신 짜오는 먹물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회고

이미 전투에서 눈 앞이 깜깜해 지는 일은 여러 번 겪어 본 신 짜오는 칠흑 같은 어둠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데마시아 방패 모서리에 찍혀 생긴 이마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자, 문득 두 눈에 피가 쏟아져 들어오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이 상처는 녹서스 공공기관 서류에 뼈 분쇄자라고 기록된 자가 남긴 작별 선물이었다.

웃기는 이름이지. 차라리 삑삑이라고 부를 것이지.

삑삑이는 이 사이가 벌어져서 숨을 내쉴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데, 숨이라도 몰아 쉬면 그 소리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삑삑이 정도야 신 짜오가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녀석이었지만, 당시 자만심이 너무 컸던 그는 뻔히 방패로 내리치는 걸 피해내지 못했다. 피에 굶주려 살육 제전을 관람하는 수천의 구경꾼들의 함성 속에서도 삑삑이의 우스꽝스런 함성 소리만은 귓전에 또렷했다. 경기장 특유의 시큼한 악취가 생생히 살아나고, 사지가 찢겨 널브러진 적들의 시신에서 흐르는 쓸개즙의 강한 냄새가 훅 끼쳐오는 듯했다. 신 짜오는 일순간, 깨져나간 대검으로 페인트 모션을 취하며 방패를 내리치려 하는 삑삑이의 변색된 투구 틈으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두 눈을 마주봤다. 생각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눈을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던 장면이 갑자기 눈 앞에서 현실로 탈바꿈하자 신 짜오는 잠시 당황했다. 겨우 몸을 웅크리자마자 길다란 방패가 머리카락을 쭉 긁고 지나갔다. 신 짜오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삑삑이의 회전 베기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오른손으로는 창을 굳게 잡아 봤지만 손가락은 허무하게 손바닥을 파고들 뿐이었다. 내 창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관람석의 군중은 요란스럽게 죽이라고 연호하고 있다. 신 짜오가 흘끗 올려다보자, 잊고 있던 과거 속의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삑삑이는 적이 어리둥절해 있는 틈을 이용해 덮쳐 들며, 찌그러지고 낡은 방패 뒤에 숨겼던 칼을 푹 찔렀다. 모랫바닥에 주저앉은 채 신 짜오는 피할 수도, 궁리를 짜낼 수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삑삑이의 칼날이 신 짜오의 미간을 베고 들어와, 칼끝이 두개골을 지그시 눌렀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신 짜오의 초점이 왼손으로 꽉 붙잡은 적의 칼날 밑동에 맞춰졌다. 손목을 타고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난데 없이 몰아친 사건들을 파악하느라 정신임 멍한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는 법이 없는 믿음직한 반사신경만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신 짜오는 벌떡 일어나며 오른손으로 일격을 날려 칼날을 뚝 부러뜨렸다. 적이 흠칫 놀라는 쇳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부러진 칼날을 꽉 잡은 왼손을 내질러 삑삑이의 투구 틈 눈을 적중시켰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곧 관중석에서 귀청이 터질듯한 환호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공포스럽게도, 삑삑이는 쓰러지는 대신 그저 바로 앉을 뿐이었다. 신 짜오가 흠칫하며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삑삑이는 눈에서 부러진 칼을 쑥 뽑더니 투구를 벗었다. 신 짜오는 자기 스승 데마시아 국왕 자르반 2세의 피에 젖은 얼굴을 알아보고는 경악하여 풀썩 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신 짜오의 고통을 즐기기라도 하듯, 자르반은 싱긋 미소를 짓는 것이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신 짜오?”

목소리에서 더 이상 쇳소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신 짜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는 거요?”
“질문에 대답하시오.”
“난 데마시아와… 진정한 국왕을 대표하려 하오.” 

신 짜오도 어렴풋이 지금 이 상황 모두가 잔인한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의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주적인 녹서스를 무찌르기 위함인가?”
“데마시아에 봉사하기 위해서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칼에 뭉개진 눈이 신 짜오의 반응을 살펴보려 실룩거렸다. 비할 바 없이 끔찍하지.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군.”
“비할 바 없이 끔찍하다? 정말인가?” 자르반이 주위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살아오면서 이 정도와 비교할 경험은 많았을 텐데?”
“이제 충분한 것 같은데. 당신들의 시험에 통과한 거요?” 신 짜오는 이런 장난에, 그리고 마음 속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데에 지쳐 버렸다.
“그래 끝났소, 신 짜오. 하지만 진정한 시험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요.”

그리곤 눈 하나만 남은 채 싱긋 웃는 자르반의 얼굴이 경기장과 함께 검은 연기로 푹 터지며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니 이 곳은 좁아터진 대기실, 리그로 통하는 것이 틀림 없는 길다란 복도를 마주한 채 서 있었다. 등 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문이 부드럽게 닫히며 그만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신 짜오는 그대로 푹 쓰러져버리고만 싶었다. 바로 등을 돌리고 이 자릴 떠나, 두 번 다시 이 곳에 눈길조차 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자르반의 말을 떠올렸다. 적어도 이 목소리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우리 모두를 짓뭉개버릴 수도 있는 무거운 부담을 대신 짊어질 용기 있는 자들이 필요하네. 자넨 진실로 데마시아 인이야, 신 짜오. 자네가 가진 힘을 믿게나. 자넨 절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일이 없을 테니.”

신 짜오는 몸을 곧게 펴고서 리그 오브 레전드로 행군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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