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의 심판 - 12회 카시오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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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카시오페아가 화려한 복도를 따라 서늘할 정도로 우아한 기품을 뽐내며 미끄러져 들어온다. 텅 빈 대리석 복도에 비늘이 스치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우아한 곡선과 당당한 자태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뱀 모양의 하체가 소름 끼치게 혐오스럽다. 코브라 모양의 관을 쓴 아름다운 얼굴엔 오싹한 결의가 흐르고, 뱀 형상의 꼬리는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기어간다.

카시오페아는 양옆에 표범이 새겨진 웅장한 한 쌍의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문 위엔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글을 읽는 두 눈이 못마땅한 듯 가늘게 찌푸려진다.

카시오페아가 맹수의 발톱 같은 손가락을 문쪽으로 쭉 뻗는다.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칠흑같이 어두운 실내가 드러난다. 잠시 주저하듯 어둠 속을 살펴보던 카시오페아는 자세를 꼿꼿이 펴더니 안쪽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간다.


회고

어떻게 된 일인지, 예전에 살던 녹서스 저택의 방 안에 돌아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쳐진 아름다운 커튼이 엿보는 자들의 시선을 막아줬다. 커튼의 레이스 틈으로,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아버지 [마커스 뒤 쿠토]] 장군이 보였다. 카시오페아는 위엄 어린 군복부터 군인다운 당당한 자세까지,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그리운 심정으로 응시했다.

아버지가 앞으로 걸어오며 둘 사이를 막고 있는 커튼 쪽으로 손을 뻗자, 잠시 겁에 질려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매번 가족에게 자기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면 언제나 불안해서 속이 뒤집힐 지경이 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절 보지 마세요!”

카시오페아가 비통하게 외쳤다.

장군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하지만 이내, 애써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내 딸이야, 카시오페아. 네가 얼마나 예쁜데.”
“거짓말!” 

카시오페아가 돌아서면서 뱀처럼 쉭쉭대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래도 소용없이, 커튼이 스치며 아버지가 다가오는 소리가 다 들렸다.

“우리 딸, 아빨 보렴.” 

장군의 간청하는 말에, 카시오페아는 마지못해 따르며 무시무시한 갈퀴처럼 변해버린 손을 들어 올려 눈물을 훔쳐냈다. 하지만 대답을 이을 순 없었다.

“카시오페아,” 

장군이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소환을 받았단다. 위험한 임무지만 거절할 수가 없어.”
“그럼 언닐 데려가세요. 아빠를 지켜 드릴 거에요.” 

카시오페아가 흐느껴 울며 말했다. 하지만 마커스는 고개를 저었다.

카타리나는 돌아올 수 없단다. 아이오니아와의 문제도 아직 해결 안 났고, 리그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올 수가 없어요.”
“아빠가 돌아오시지 못하면 전 정말 혼자가 되고 말아요.” 

그녀가 애원했다. 장군이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지려 했지만, 딸은 움찔하고 몸을 빼더니 다시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자 장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넌 뒤 쿠토 가의 딸이다, 카시오페아. 네가 충성을 다 하는 조국 녹서스는 국민을 절대 저버리지 않아. 혼자가 될 일은 절대 없다.” 

그러더니 장군이 잠시 말을 멈췄다.

“언젠가는 너도 네가 져야 할 의무를 다시 기억하게 될게다.”

그리곤 뒤 쿠토 장군이 카시오페아의 손을 잡더니, 밀랍으로 봉인한 편지 하나를 조금 구겨질 정도로 손바닥에 꼭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하거든, 이 편지가 너와 카타리나가 앞으로 갈 길을 일러줄 게다, 카시오페아.”

아버지가 떠나려고 등을 돌리는 소리에 카시오페아는 다시 겁을 집어먹었다. 급히 몸을 돌려봤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손에 쥐어진 편지를 자세히 살펴봤다. 밀랍 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누가 벌써 내용을 확인한 듯 봉인이 깨져 있었다. 카시오페아가 편지를 펼쳐 읽었다.

핏빛처럼 붉은색 잉크로 쓴 필체는 이렇게 지시하고 있었다.

“상아 지구 초월의 길. 오후 5시.” 

그 아래엔 흑장미 그림이 찍혀 있었다. 문득 시계탑의 종소리가 뎅뎅 울리더니 소란스런 소리가 이어졌다. 곧 집안이 온통 정신없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 두런두런 속삭이는 소리들에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이윽고 누군가 주저하듯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지 안 봐도 뻔했다.

“들어와!” 

카시오페아는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버럭 명령했다. 활짝 열린 문 뒤로 아버지의 경호원 하나가 보였다. 그가 커튼 너머에 있는 그녀의 그림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방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려움과 수치심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카시오페아 아가씨,”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부친께서 방금…”

카시오페아가 남자의 말을 끊었다.

“변명 따윈 필요 없어 바보 같은 놈! 어떻게 된 건지만 말해!”
“시장엘 갔는데,”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부친께서 글쎄 돌연 사라지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라고 했잖아, 잊었어?” 

카시오페아가 남자를 조롱하면서 둘 사이를 막고 있는 커튼 쪽으로 다가왔다. 군인은 면목이 없어 시선을 떨구곤 아무 대답도 하질 못했다. 카시오페아는 드리워진 커튼에 예리한 발톱 끝을 꽂더니 단번에 찢고, 흉물스런 몸뚱어리를 그대로 드러내며 명령했다.

“대답해, 이 멍청아!”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치는 경호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왜 그래?” 

카시오페아가 짐짓 놀란 척하면서, 무시무시한 손을 놀리듯 남자의 얼굴로 뻗었다.

“내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봐?”

그녀는 예리한 손톱으로 남자의 목을 단단히 거머쥐며 점점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의 몸뚱이를 바닥에서 들어 올리는 순간, 유리가 깨진 회중시계가 놈의 주머니에서 툭 떨어졌다. 고장 나며 멈춘 시계바늘은 5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희가 찾아낸 건 이게 전붑니다.” 

목이 꽉 졸린 채 남자가 겨우 대답했다. 카시오페아가 돌로 바꿔버리는 시선으로 뚫어지게 응시하자 남자의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며 부르르 떨렸다. 그런데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는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눈에서는 두려운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로소 깨달음이 전율처럼 카시오페아의 기다란 뱀 몸통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협잡꾼,” 

카시오페아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독액이 뚝뚝 배어 나왔다.

“고작 네놈들의 구역질 나는 호기심이나 채우자고 감히 아버지를 잃던 그 순간으로 되돌려놔?”

이 말을 듣던 경호원의 표정도 그 눈빛만큼이나 딱딱하게 변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카시오페아?” 

남자가 물었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카시오페아가 내뱉듯 대답했다.

“너희 중 누군가는 뭔가 아는 게 있을 테지. 난 복수를 원해.”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카시오페아가 남자의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무표정하게 내뱉었다.

“죽어버려.” 

그러자 남자의 형체가 붙든 손아귀 속에서 스르르 사라지더니 사방에 어둠만이 남았다. 그리곤 리그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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