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의 심판 - 18회 자르반 4세

게임세상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찰

애초에 자르반을 맞이하기로 했던 데마시아의 수련 소환사는-아아, 어쩌다 이런 일이-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심판 당일 막바지에 부와 출세를 거머쥘 기회라면 절대 놓치지 않는 빌지워터 출신의 젊은 소환사로 대체됐다. 새로 배정된 이 청년은 자르반이 예정보다 빨리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해 준 것 같은데, 그를 평가할 이는 리그는 아닐 것이다.

자르반이 한껏 거만한 태도로 대전당에 들어선다. 제 아비를 딱 닮아, 다른 이들은 자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는 듯한 태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다. 방어구는 호화롭기는 하나 전혀 실용적인 데는 없으며, 그간 해치운 야수들의 가죽을 주렁주렁 건 걸 보면 과시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라이트실드 가문의 개답게 튀어나온 턱을 보면, 권위보다는 몽둥이나 휘두르는 편이 훨씬 어울려 보인다. 안하무인인 데다 오만한 꼬락서니는 왕세자에게 바치는 대중의 찬사가 다 아까울 지경이다.

사육이 필요한 야수인 양, 자르반은 위풍당당하고 거칠게 문으로 당당히 나아간다. 입구를 지나고, 빛을 지나서… 이제 내 손아귀 안으로.

환영한다, 자르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거든.


회고

왕족에겐 왕족의 특권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인 자르반 라이트실드 3세 왕의 침착한 목소리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자르반 왕자의 귀에 들려왔다. 왕자가 항의했지만, 왕은 자르반이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신 짜오에게 리그에서 겪었던 심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라 명했다. 리그의 규칙에 반하는 일이었으나 자르반 3세는 이를 그저 ‘불가피한 위반’이라 말할 뿐이었다. 시험은 일단 술책만 파악하면 대단치 않을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 과거에 겪은 충격적인 장면들을 대면한 후 질문 한두 개에 대답하는 것뿐이니. 자르반은 시험을 정당하게 치러낼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못내 씁쓸했다. 부하는 자기 힘으로 이겨낸 시험을, 속임수나 써서 극복하려는 왕자가 도대체 무슨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일국의 지도자가 지어서는 안 될 표정이었으나, 어둡고 조용한 이곳에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신 짜오는 회고의 방을 ‘심연 같은 어둠이 자욱한’ 곳이라고 묘사했으나 그건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었다. 물론 어둡긴 했지만, 그 밖에는 평범할 뿐이었다. 빛이 없다고는 하나 어둠이 방 안에 있는 다른 존재의 모습을 숨겨주는 것도 아니었다. 자르반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전혀 다른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이 어리석은 연극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둔 채 한가로이 서서 기다렸다.

그 형상은 비좁은 대기실 반대편 쪽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자르반에게서 3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자르반은 그 존재에게는 별 관심 없이 환상이 시작되기만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기이한 신기루에 휩쓸리는 대신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둠 속에서 돌연 공격이 시작됐다.

자르반은 아무 준비도 없이 허를 찔리고 말았다. 앞에 있던 형상이 칠흑 같은 날개를 넓게 펼치더니 앞으로 돌진해 왔다. 뒤로 물러나 방어 태세를 취하려 했으나 땅 아래서 솟아 나온 날카로운 발톱이 양다리를 붙잡아 그 자리에 붙박아 두었다. 주위로 검은 피조물들이 잔뜩 몰려와 드러난 살을 쪼아댔다.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그림자는 이제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명백한 의도를 드러내며 자르반에게 돌진해 왔다. 피보다 더 붉고 타오르는 불덩이보다 뜨거운 여섯 개의 눈이 그를 노려보자, 주위 대기까지 증오로 들끓는 듯했다.

"스웨인이군."

자르반은 살이 찢기는 고통을 무시하며 다리를 움켜쥔 발톱들을 거칠게 떼어냈다. 적의 심장을 노리며 창을 내지르자 창끝이 날개 달린 형상의 가슴에 닿아 깊숙이 파고들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을 정도로 오싹한 함성을 내지르며, 자르반은 스웨인을 번쩍 들어 넘겨 뒤쪽 벽으로 내던져 버렸다. 어렴풋한 실루엣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가운 돌벽에 부딪치더니 털썩 땅으로 쓰러져 버렸다.

돌아서는 자르반의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

“네놈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다면, 상대를 아주 잘 골랐군!” 

자르반은 스웨인의 머리를 베려고 돌격했다. 이게 환영이든, 실제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한 발짝을 겨우 떼자마자 에너지 덩어리가 대기를 가르며 날아들더니 갑옷을 관통하여 몸을 태워 들어갔다. 광선이 몸을 훑자 온 방에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자르반은 고통에 휩싸여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방에 걸린 횃불이 방을 비추자,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스웨인이 아까 쓰러졌던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옆에서는 까마귀가 부리에서 에너지 줄기를 뿜어내며 허공을 맴돌았다. 스웨인의 가슴에는 짙은 주홍빛의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난 증명할 필요 따윈 없다. 왕자.” 

스웨인은 맛있게 베어 먹던 고깃덩이에서 구더기라도 나온 양 역겹게 왕자라는 호칭를 내뱉었다.

“리그의 실수로 네가 ‘불운하게’ 서거한다면 꽤 만족스러울 텐데 말야. 그렇게 될 것도 뻔하고. 그럼 네 아버지가 그 조약이라는 걸 어떻게 할 지 궁금한데.” 

스웨인이 주먹을 쥐자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마법의 기운이 나타나 손안에서 흘렀다. 잠시 후 손을 펴자 마법 줄기가 앞으로 뻗어 나가 까마귀의 힘을 더욱 증폭시켰다. 격렬한 고통에 자르반이 눈을 부릅뜨더니, 이윽고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정말 답답할 정도로 멍청한 데마시아 인이군. 전략도 요령도 없이 달려들다니, 내 적수라고 하기도 역겨울 정도야. 널 얼른 처치해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는군그래. 그럼 좀 더 내게 걸맞는 상대가 네 자리를 차지하기라도 할 텐데.” 

이 말과 함께 스웨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르반이 보는 앞에서 몸이 부풀어 오르면서 여기저기 늘어나더니 흉측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그 몸에서 까마귀가 솟아 나오더니 자르반에게 달려들어 살갗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새떼가 몰려들 때마다 방 안의 횃불이 깜박거리더니 하나하나 꺼져 갔다. 마지막 횃불마저 꺼지고 나니 보이는 것은 흉하게 일그러진 스웨인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는, 피에 굶주린 여섯 개의 점뿐이었다. 자르반의 시야가 흐려지면서 점들이 하나로 뭉치더니, 결국 모든 것이 어둠에 물들어 버렸다.

이제 자르반은 학회에서 멀리 떨어진, 전에 와 보았던 장소에 있었다. 삶과 죽음의 외로운 기로였다. 그곳은 영원한 평화의 절벽 끝, 끝없는 잠을 향한 관문이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언젠가는…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눈을 감은 그의 몸속에서,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영혼 밑바닥을 뚫고 내려간 존재의 한복판에서 어떤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소리는 넘실대며 퍼지더니 결국 심장에서 터져 나와 혈관을 데우고 근육까지 번져갔다. 이윽고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자기 살을 뜯어 먹고 있는 까마귀 떼만큼이나 강력하고 생생한 분노 그 자체였다. 조상들의 목소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데마시아 전사의 전투 함성이자 왕자로서의 외침이었다. 자신이 내지른 함성이 귓가에 울리자 자르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눈은 더이상 보통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눈에 깃든 불꽃이 야수의 탄생을, 제왕으로서의 각성을 알렸다. 이윽고 그 눈이 스웨인을 포착했다.

자르반은 자신을 움켜쥐고 있는 발톱들을 부러뜨리고 점점 더 죄어오는 부리를 산산조각내며 벌떡 일어서더니, 창도 버린 채 앞으로 뛰어들었다. 자르반이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자 스웨인의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 자르반은 스웨인의 몸뚱이를 벽에 내리치며 계속 움직였다. 움켜쥔 손가락 틈으로 어렵사리 지나는 부드러운 숨결에 그는 손을 더욱 단단히 그러쥐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날카로운 미소가 자르반의 입가에 떠올랐다.

“전략? 요령? 

전쟁에는 승리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녹서스 인이여.” 자르반은 까마귀가 자신의 살덩이를 찢어 내어 스웨인에게 그 생명력을 날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눈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것으로 보아, 죽음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르반은 스웨인의 불거진 눈에서 생명이 사그라지는 것을 볼 때까지는 절대 눈을 감지 않을 수 없다는 다짐으로 남은 온 힘을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서로 상대를 끝장내기 전엔 절대 먼저 죽지 않으려 뒤엉킨 둘의 밑에 피가 고여 웅덩이를 이뤄갔다.

“그만해 두세요!” 

돌로 만들어진 학회의 전당에 쨍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르반은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려 스웨인에게서 멀리 휙 날려가 반대편 벽에 부딪히기 일보 직전에 멈췄다. 그리곤 허공에 뜬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인간 형상으로 돌아온 스웨인 역시 방 반대편 허공에 떠 있었다. 늘 함께 다니는 새 한 마리를 빼곤, 까마귀는 모두 온데간데없었다.

베사리아 콜민예 상임 의원은 뒤집어썼던 후드를 내리며 처음엔 자르반을, 그다음에는 스웨인을 쏘아 보았다.

“무슨 짓입니까, 스웨인? 여기는 신성한 곳입니다. 당신의 음험한 게임은 이곳에선 용납되지 않아요.” 

그리곤 자르반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유 때문에 리그에서는 당신을 받아들일 겁니다만, 오늘 일에 대한 보복을 꿈꿨다간 정치적인 끈을 동원한다 해도 리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겁니다.” 

그녀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오늘 여러분이 서로에게 선사하려 했던 운명이 차라리 낫다고 후회하게 될 거에요.”

베사리아가 손목을 획 젖히자 스웨인이 마치 헝겊 인형처럼 허공을 날아 훌쩍 방 밖으로 휩쓸려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베사리아가 넌더리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자르반은 여태 입은 상처로 고통스러워 신음하며 볼품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창으로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일어났지만, 리그로 향하는 문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그냥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절룩이며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그러모으는 그의 머릿속에서, 부친이 일러줬던 말씀이 메아리쳤다. 그러자 겨우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왕족에게는 왕족의 특권이 있는 법이다…


연관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