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의 심판 - 10회 이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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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챔피언명 : 이렐리아
  • 날짜 : CLE 20년 11월 12일


관찰

대전당으로 들어서는 이렐리아의 앞에서 날이 네 갈래로 갈라진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렵하게 나아간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이 특이한 무기는 신기하게도 공중에 부양해서 자기 혼자 움직인다. 무신경하게 그 뒤를 따르는 이렐리아의 머릿속은 온통 당면한 과제에 쏠려 있다. 면접에 대비해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갑옷을 손질해 둔 것 빼곤, 외모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칼이 물결치듯 나부끼다가 일순 얼굴이 드러난다. 앳된 얼굴인데도, 두 눈에 반짝이는 청춘의 생기는 숱한 전투를 치르면서 조금 퇴색한 듯하다.

이렐리아에게선 아이오니아 근위대장다운 용맹한 기상이 풍긴다. 아이오니아의 국방 총책임자라는 중책이 부담스럽기도 하련만, 아이오니아 최고 유공자에게만 수여되는 예우의 어깨보호대를 걸친 모습은 당당하고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어디로 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이렐리아의 검이 그녀를 앞서 대리석 문 앞으로 휙 날아가더니, 문 위에 새겨진 글귀 앞에 딱 서서 미세하게 떨며 아주 높은 고음의 윙윙 울리는 소리를 낸다. 불안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흥분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이렐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회고

칠흑 같은 어둠이 이렐리아 주위를 뒤덮고 있다. 면접을 치르기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검이 자기 주위를 빙빙 돌면서 이렐리아의 눈엔 보이지 않는 위험 요인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걸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리그 요원들이 이쪽으로 올 땐 부디 조심해서 다가와야 할 텐데, 갑자기 덮치기라도 했다간 불행한 결과가 오리란 걸 알고나 있으려나. 이렐리아는 강철과 교감하는 능력이 있어, 금속이 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위험한 것들이 있진 않은지 확인하려고 두 눈을 감고 오감을 증폭시켰다. 예전에 아버지가 가르쳐준 명상법이었다. 공기도 물이나 다름이 없단다. 파동이 번지는 걸 느껴 보렴.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다음은 뭐라고 하셨더라- 이렐리아는 뒤로 재주를 넘으며, 머리를 향해 날아든 날카로운 단검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착지해 웅크리는 그녀를 노리며 곧바로 두 번째 단도가 허공을 갈랐다. 아버지의 검은 어딜 갔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위협을 감지하고 고개를 홱 숙이는데 단도가 스쳐 지나갔다. 이 예리한 칼날에 뺨을 벴지만 이렐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파동은 그다음 일어날 일을 예고해 준다.”

리토 사부가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비록 가리개로 덮고는 있으나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린 리토의 왼손에는 단도 두 개가 더 들려 있었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이렐리아의 입이 놀라서 떡 벌어졌다.

“아버지?”
“숨기려 할 것 없다. 기왓장에 피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려.”

그 말에 이렐리아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붉은 테라코타 기와는 자기 집이 틀림없지만, 이미 몇 년이나 전에 자운산 마법횃불의 메스꺼운 녹색 불꽃에 삼켜져 송두리째 사라진 이 집이 실제일 리가 만무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리토가 파란색 로브의 주름 사이에 숨겼던 칼집에 단도들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급히 숨을 들이쉬며 두 손을 뻗어 원을 그리듯 움직이며 기를 모았다. 이렐리아에게 훈련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 잠깐만요,” 

이렐리아가 항의하려고 입을 뗐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커다란 기합과 함께 공격이 시작됐고, 이렐리아가 피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이십 보나 떨어져 있었지만, 아버지의 훈련용 도복 소맷자락이 휙 뻗쳐오며 순식간에 그녀의 가슴팍을 제대로 가격했다. 이렐리아는 기와를 타고 미끄러지며 뒤쪽으로 휙 밀려나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다음, 몸을 굴려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갔다. 리토의 가차없는 공격이 우레같이 쏟아지더니, 일순 잦아들었다.

“엉망이로구나. 마음이 흐려져 있으니 그렇지.” 리토가 손목을 가볍게 젖히자 소맷자락이 지붕 끝까지 휙 뻗어와 이렐리아의 목에 감겼다. 그리고 손목을 다시 젖히자 이번엔 이렐리아의 몸이 휙 떠올라 아버지 쪽으로 날아갔다. 마침내 수련의 대미를 장식하는 아버지의 위력적인 한발 돌려차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뭔가 붉은 것이 그 앞을 막아섰다.

“훈련받는 소리가 나던데. 애먹고 있는 거야 이리?” 

고소해 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역력했다.

“젤로스!” 

이렐리아는 이제 말까지 더듬거렸다. 젤로스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오른팔로 아버지의 돌려차기를 막으며 왼손으로는 옷소매를 붙잡아 이렐리아가 몸을 빼낼 수 있게 도와줬다. 목을 단단히 조이던 천이 그제야 풀렸다.

“자, 이거 받아,” 

오빠가 아버지 쪽을 보며 싱긋 웃자, 눈을 가려도 다 보이는 듯 아버지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야 공평하지.”

젤로스가 검 하나를 이렐리아에게 던졌지만, 채 받기도 전에 리토가 다른 쪽 소맷자락을 날려 가로채버렸다. 그리곤 공중으로 도약하더니 수평으로 빙빙 돌며 검을 둘둘 감아버렸다. 이 바람에 젤로스도 기왓장 위로 나가떨어졌다.

“좋아, 시작한다!” 

젤로스가 등에 멘 칼집에서 검을 뽑아 아버지 쪽으로 휘둘렀다. 리토를 완전히 베어 버릴 듯한 일격이었다. 이렐리아가 벌떡 일어나 앞쪽으로 재주를 넘으며 도끼 차기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러나 위력을 모은 발꿈치는 리토가 그새 들어 막은 검의 편평한 면을 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젤로스가 기를 모아 이번엔 한발을 거꾸로 돌려 찼지만, 역시 팔을 들어 막고 말았다. 옷소매에 꽉 붙들린 검이 달그락거리며 떨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렐리아가 무기 쪽으로 몸을 날렸다. 리토의 소맷자락이 포물선을 그리며 뻗어왔지만, 미리 수를 내다보고 있었기에 이쯤은 대비하고 있었다. 이렐리아는 오른손으로 옷자락을 짚고 착지하며 기왓장에 못박았다. 그리곤 몸을 비틀며 발로 칼자루를 걷어차 공중으로 가뿐히 날려보냈다. 다른 발로 허공을 가르며 칼등을 차자 검 끝은 이제 리토를 향해 쏜살같이 되돌아갔다.

검에 복부를 관통당한 리토가 눈을 덮고 있던 가리개를 풀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이렐리아, 이게 무슨 짓이냐?!” 

리토가 숨이 멎어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이렐리아는 무표정하게 아버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이렐리아, 진짜로 다치셨잖아!” 

젤로스가 어이없어하며 쏘아붙였다. 이렐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검이 몸을 뚫고 나오긴 했네.”

그 말을 듣자 리토의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싹 가시더니, 이내 능글맞게 씩 웃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이렐리아?”
“내가 힘이 부족해서 고향이 쑥대밭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오니아에 다신 그런 일이 닥치지 못하도록 내 목숨을 걸고 싸울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그래,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이렐리아가 깔깔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웃는 너털웃음이었다.

“가족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 건 고맙군. 그런데 아버지였다면 우리 남매가 단 한 번이라도 가격하도록 두셨을 턱이 없어.
 폭풍우 치는 날 바로 여기 이 지붕 위에 서서도 전혀 젖지 않는 경지를 인정받아 장로가 되신 분이다. 미동 하나 없이도 내리는 비를 전부 피해내셨지. 내 마음 속쯤 실컷 들여다봐도 좋아. 그래 봤자 내 본성은 절대 간파할 수 없을 테니까.”

이제는 벽이 움푹 들어간 대기실 안, 이렐리아 앞뒤의 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검이 곁에 떠서 든든하게 그녀를 지켜주고 있다. 번쩍하고 섬광을 발하며 검이 네 갈래로 갈라지자, 주위의 문들이 죄다 활짝 열렸다. 이렐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성큼성큼 리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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