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의 심판 - 19회 녹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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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전장 건축가의 긴 하루가 이제 저물어 가고 있다. 전장 지면에 붕괴의 조짐이 있는지 점검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잡한 에너지 장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어긋난 부분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대략 1.5미터 간격으로 측정을 해야 하는데, 조그만 흠 하나라도 간과하고 지나쳤다간 정의의 전장에서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는 마법 탓에 파괴적인 연쇄 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구역의 측정을 끝낼 때마다 건축가는 자신이 룬테라를 구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다.

이윽고 점검 작업을 마무리 지은 건축가는 넥서스를 지나쳐 소환사의 제단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분명히 휴면 상태에 접어들었어야 할 넥서스 안에서 알 수 없는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발길을 돌린 그는 넥서스에서 돌연 뻗어 나온 거센 에너지에 가격 당해 무정하리만큼 차가운 자갈밭에 나가떨어진다.

벌어진 입에서 독기를 품은 짙은 연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건축가의 몸이 점점 쪼그라들어 간다. 생명을 얻은 그 연기는 공포스럽게 고동치고 있다. 그건, 악몽에게서 탄생한 것이다.


회고

녹턴은 영겁의 시간 동안 여러 인간의 마음을 떠돌아다녔다. 인간들이 꿈에서도 갈망하는 수많은 얼굴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혈관을 따라 도는 욕망을 흡수했으며,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불태우는 환상들 속에서 살았다. 그렇게 녹턴은 인간의 보잘것없는 뇌 속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는 천한 환상들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그리고, 자신이 머물렀던 모든 이들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먹어 치웠다.

새로이 얻게 된 손에 잡히는 몸이란 것을 채 보기도 전에, 로브를 걸친 소환사들이 나타나 녹턴의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녹턴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 소환사들은 악몽에 사로잡힌 모든 소환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얼굴이었고, 부하에게 막대한 권력을 약속하는 말들을 쏟아 붓는 목소리이자, 온 세상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는 손이었다. 녹턴은 이 인간들이 원하는 바가 뭔지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었다.

녹턴의 그림자 같은 몸이 그 중 한 인간에게로 소리 없이 다가가, 그의 의식에서 가장 나약한 부분에 파고들었다. 로브로 몸을 감추고 있던 그 소환사는 경련을 일으키며,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온 몸의 피가 얼어붙을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이윽고 정신이 산산이 붕괴되면서 소환사의 비명도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소환사들은 녹턴이 공격해 오기 전까지 변변찮은 대응조차 펼칠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한 쌍의 그림자 칼날을 든 팔이 앞으로 뻗을 때마다 누군가의 살이 찢겨져 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림자는 멈추지 않고, 자세를 낮춰 한 인간에게 달려들더니 아래에서부터 위로 칼을 휘둘렀다. 목표가 된 불운한 소환사의 몸은 불쌍하게도 베어지고 말았다.

녹턴은 등 뒤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의 몸이 잠깐 고동치는가 싶더니, 전장 전체에 어둠이 깔리고 한숨을 내뱉는 듯한 암흑이 무겁게 주위에 가라앉았다. 영원히 환영에 갇혀 버린 희생자들이 소환사의 귓가에 영원한 고통을 약속하거나, 제발 해방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말들을 속삭였고, 어디선지 몸 없는 손들이 나타나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겉모습을 떼어내어 가지려는 듯 살아 있는 자들을 마구 할퀴어 댔다.

남아 있는 소환사들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 기분 나쁜 손가락들을 떨쳐내려 했지만, 잠깐 사라졌다가도 곧 더 많은 손이 다시 나타났다. 주문을 외워보려 해도, 마법 에너지가 부름에 응하지 않아 입안에서만 떠돌 뿐이었다. 어둠이 점점 죄어 오자, 앞을 보지 못하는 두려움에 휩싸인 인간들은 거칠게 눈을 비비며 필사적으로 앞을 보려 애썼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녹턴이 다가오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고, 녹턴의 검이 자신들의 부드러운 몸을 갈라 영혼마저 어둠으로 보내 버렸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한 소환사가 금색 끈으로 장식한 보라색 로브를 걸치고 서 있었다. 그는 실명과 공포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눈앞에서 일어나는 대학살을 냉담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피가 웅덩이를 이루어 로브 아래 자락에 얼룩이 남아도, 잘린 동료의 머리가 날아와 무릎에 부딪혀도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그 소환사는 입을 열었다.

“인상적이군. 인간 영혼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보낸 시간이 아무 소용도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지”
“나는 네가 누군지 안다.” 

녹턴이 대답했다.

“그것 참 영광스러운데.” 

소환사는 코웃음 쳤다.

“그럼 이제 우리 인간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 죗값을 치를 시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군.”
“어떻게 할 작정인가, 인간이여.” 

그림자 안에서 인간이었다면 웃음소리라고 부를 만한, 소름 끼치는 울부짖음이 메아리 쳤다.

“넌 지금 우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있어. 그러니 우리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지금 이 가련한 모습을 ‘보상’이라고 말하는 건가?”

녹턴이 무시무시한 칼날을 한 번 휘두르자, 칼에 묻어 있던 아직 온기가 남은 피가 땅 위로 떨어졌다. 녹턴은 마지막으로 남은 이 어리석은 인간에게 들쭉날쭉하게 생긴 칼날을 겨눴다.

“나를 어쩌다가 이 세상으로 불러냈는지는 몰라도, 그 대가로 네가 받을 건 파괴뿐이다.”

녹턴은 노성을 지르며 소환사에게 달려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칼날이 짜증 날 정도로 이죽거리고 있는 그 인간의 얼굴 바로 앞에까지 왔을 때, 녹턴의 손목을 감싸는 수갑이 나타나 철컥 소리를 내며 잠겼다. 그리곤 한 무더기의 금속 사슬이 녹턴을 뒤로 끌어당겼다.

“아니, 이게 바로 진정한 보상이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소환사는 입을 열었다.

“리그에 온 걸 환영한다.”

녹턴 주위에 한 무더기로 엎어져 있던 소환사들의 시체가 일제히 고개를 들더니, 팔을 뻗어 녹턴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너무도 강력했기에 녹턴은 자신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그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앞에 우뚝 선 소환사의 수장에게 억지로 고개 숙여 절을 하면서 족쇄를 벗어나려 힘껏 절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녹턴은 이제 리그의 명을 따라야 했고, 그것은 그의 영원한 악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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